도시에 남은 예술가들의 흔적

그들이 남긴 그림과 글귀에 마음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예술가들의 삶이 담긴 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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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 1세대인 수화 김환기를 기리기 위한 미술관이다. 공기를 ‘환기’시킨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그런 기분이 든다. 나무와 꽃이 둘러싼 하얀 건물과, 부암동의 고즈넉함도 한몫한다. 본관, 별관, 수향산방으로 구성된 이곳은 작가 김환기의 미술관인 동시에 그의 아내 김향안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그들은 완벽한 소울메이트였다.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김환기가 프랑스로 떠나기 1년 전인 1955년, 혼자 파리로 떠나 미리 터를 닦아놓은 사람은 김향안이었다. 197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가 구상하던 현대미술관을 이렇게 실현한 사람도 김향안이다. 김환기의 뉴욕 작업실이 복원되어 있고 그가 아내에게 쓴 편지들이 전시된 수향산방 입구엔, 그녀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내 영혼은 수화(樹話)의 영혼하고 같이 미술관을 지킬 것이다.” (개화기 멋진 신여성으로, 수필가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김향안이 알고 싶다면, 그녀의 수필집 [월하(月下)의 마음]을 추천한다.) 환기미술관은 김환기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이를 다양한 콘셉트의 기획전으로 소개한다. 
 
현재 이곳에서는 [김환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1950년대 초에서 1970년대 말까지 김환기의 대표작과 드로잉, 콜라주 등 4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는 김향안의 문장으로, 그녀가 1989년 김환기의 전기를 다룬 책의 제목이다.(이번 전시는 김향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본관 전시장 곳곳, 그림 옆에는 김환기의 일기가 쓰여 있다. “봄내 신문지에 그리던 중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1967년 10월 13일의 일기다. 1967 년은그가 뉴욕에서 생활할 때다. 그리움, 외로움, 혹은 두려움일까. 일기와 그가 찍은 노랗고 파란 점들을 번갈아보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김환기와 김향안, 1957,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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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김환기, 1970년 1월 8일 일기

김환기, 16-Ⅸ-73 #318, 1973, 코튼에 유채, 265x20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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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동주]와, 베스트셀러에 오른 1955년 초판본 시집을 복간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時)]. 이들을 통해 우리는 2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를 다시 떠올렸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던 윤동주는, 종종 인왕산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그가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현재 ‘시인의 언덕’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윤동주문학관이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작고 오래된 수도가압장이었던 곳에 문학관을 세웠는데 뒤늦게 발견된 물탱크 두 곳이 활용됐다. 모티프는 ‘우물’. 물탱크 한 곳은 지붕을 걷어내고 제2전시실 ‘열린 우물’이, 다른 한 곳은 그대로 유지해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이 되었다. 친필 원고와 사진 자료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시된 제1전시실에도 작은 우물이 있다. 생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시실을 차례로 둘러보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닫힌 우물’에서, 그의 생을 담은 짧은 영상이 상영된다. 공간을 울리는 내레이션, 습한 냄새, 그리고 천장에서 흘러 들어오는 한 줄기 빛까지, 그의 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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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집
이상의 집
이상의 집에서 커피를 마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이 살던 ‘집터’ 일부에 자리한 문화공간 ‘이상의 집’에서 마셨다. 아들이 없던 백부 댁에 입적한 이상은 이곳 통인동 154-10번지에서 스물세 살까지 살았다. 전면이 유리로 된 건물에 지붕 서까래를 드러낸 이 가옥은, 실제 그가 살았던 집은 아니다. 하지만 통인동의 터는 그가 27년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장소로써 의미를 지닌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서 일했던 스무 살의 이상이 통인동에서 광화문의 조선총독부로 출근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집에는 방도 있다. 커다란 철문을 당기면 좁고 어두운 ‘이상의 방’이 나온다. 계단에 앉아 천장의 빔 프로젝트에서 쏜 영상을 본다. 이상의 집은 이상을 기억하는 이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입장료가 무료다. 도슨트 앞에 놓인 티백과 커피도 먹을 수 있다. 커피를 마시고 한쪽에 마련된 이상의 책을 읽으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흔적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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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아트센터
머리카락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 스스로 첼로가 되어 공연장에 나타나는 사람, 텔레비전으로 실험을 하는 사람. 백남준이 명확해지는 공간은 서울이 아닌 용인에 있다. 2008년 개관한 백남준아트센터. 생전 백남준은 이곳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작업했던 예술가 백남준의 작품은 이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인다. ‘TV 물고기’의 텔레비전에서 보여지는 영상은 과거에 촬영된 것이지만 그 앞에 놓인 어항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지금을 산다. 1974년 구상된 ‘TV 정원’에 심어진 텔레비전은 꽃을 피우듯 여전히 화면을 바꾼다.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사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눈으로 봐야 한다. 직접 봐야 안다. 이곳에서는 현재 백남준 추모 10주기 특별전 [다중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1층에는 백남준의 작품이, 2층에는 그의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오마주한 미디어 아티스트 11인의 작품이 7월 3일까지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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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문학관
김수영문학관
때때로 김수영을 읽는다. 위대한 시인은 느슨한 마음을 다시 붙잡게 한다. 그가 만나고 싶을 땐 김수영문학관에 간다. 도봉구 아파트 단지 사이에 김수영문학관이 있다. 도봉구는 김수영의 본가와 묘, 시비가 있는 곳이다. 김수영문학관 1층 제1전시실에는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겪으며 쓰여진 그의 시와 시학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원고지에 단정한 글씨로 써 내려간 시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한쪽에는 시를 낭독하는 공간이 있다. 낭독한 시는 녹음해 파일로 받을 수도 있다. 2층 제2전시실에서는 독서대에 앉아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골라 읽는다. [김수영 전집 2 산문]일 때도 있고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시인, 예를 들어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 같은 시집일 때도 있다. 5층 옥외쉼터에서 보이는 것은 아파트 단지 뿐이지만, 이 독서대 뒤 커다란 창문에 담긴 풍경은 꽤 낭만적이어서 한참 시간을 보내기 좋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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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2층집. 이곳은 한국화가 남정 박노수가 1973년부터 2011년까지 40여 년간 살던 집이다. 그가 생활하던 공간이 그대로 전시장이 됐다. 신발도 벗고 입장한다. 거실과 안방, 응접실 등 원래 사용하던 그의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937년경 지어진 이 집은 서양과 일본의 건축 양식이 혼합됐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이 지은 것으로, 현재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다. 격자무늬 창문, 지금은 불타지 않는 벽난로 등 집 안 곳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면 욕실, 서재, 다락이 나온다. 다락방에 앉아 작은 창으로 뒷동산을 본다. 옆에 놓인 브라운관에서 1987년 촬영된 영상 속 화백이 말한다. “자기 자신하고 쉽게 타협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집을 둘러싼 정원 덕분에 창문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초록 일색이다. 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에 오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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