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게이 퍼레이드에 대한 단상
"저것들 벗고 설치는 꼴 좀 안 봤으면 좋겠어."
이것은 성적 소수자를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장한 제스처다. 그들은 마치 성적 소수자들이 ‘벗고 설치지만’ 않으면 그들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평범하게 있어. 그냥 조용히 좀 있으라고!” 결국 이것은 성적 소수자들이 다시 벽장 속에 들어가 숨죽이고 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퀴어 퍼레이드를 개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행사엔 분명 다수에게 이해받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성적 소수자들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런데 이때 더 당황스러운 반응이 나타난다. “나도 게이지만, 퀴어 퍼레이드의 행태는 역겹네요. 일반인들은 오죽하겠어요. 얌전히 좀 살지.” 매년 퀴어 퍼레이드가 있고 난 다음이면, 이런 놀라운 발언들이 게이스북과 이반시티 게시판에 등장한다. 심지어 상당한 동조를 얻기도 한다.
‘그래,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느껴서는 안 돼!’
나 또한 거리로 나설 용기가 없고, 아직 자기 검열도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퀴어 퍼레이드에 나서는 모든 사람을 지지한다. 그들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는 점만으로도 투사다. 아직도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이 ‘정상’이라는 누가 만든 건지 모르는 기준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두 가지의 성 정체성을 강요받으면서 자신을 기만하고, 혐오에 빠져 산다. 우리는 ‘다수자’나 ‘성적 소수자이지만 다수자 입장에 서서 슬쩍 발을 빼는 사람들’의 구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퀴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게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괴물’이라는 낙인, ‘비정상’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자리다. 성적 소수자들에게 “넌 태어난 그대로 가치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다.
한편 ‘퍼레이드’인데 괜한 엄숙주의를 끄집어내지 말자. 이 세상엔 다양한 축제가 있고, 그중엔 서울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보다 더 ‘격렬’한 것도 많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자신의 발언에 정녕 편견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쉬이 뱉은 말 한마디가 칼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말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랑을 베푼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이렇듯 열심히 퀴어 퍼레이드를 변호하고 있다.
-Judy(퀴어 필름영화제 홍보대사)